<2014년 2월 15일>
<표지사진 - 충북 영동 심천면 용당리 용당저수지에서 바라본 핏골산성 전경>
필자는 충북 영동군 일대 산성을 조사, 정리하다가 '각계리산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감적으로 6C 중반 신라와 가야 및 남부여 군대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핏골에서 맞붙은 '핏골전쟁'이 발발한 이유와 그곳의 현장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핏골전쟁'은 각계리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단순 설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의 성곽과 봉수-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발간>에서는 '용당리산성'으로 나오지만, <한국고고학전문사전-성곽봉수편>에서는 '각계리산성'으로 나온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용당리와 각계리 사이의 해발 315m 대음지산 장군봉 정상부를 둘러싼 토석혼축 산성임을 감안하면 그 무엇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필자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핏골산성'으로 부르고 싶다.
필자는 <핏골전쟁(1)-2011년 3월>이란 글에서 핏골전쟁의 의의를 '<삼국사기>가 외면한 가야의 전쟁'으로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핏골이 관산성과 더불어 최대의 화약고로 돌변한 것은 가야를 둘러싸고 신라의 서북진과 남부여의 동남진이 정책이 맞부딪치면서 벌어졌다. 남부여는 북동방의 고구려 때문에 할 수 없이 신라와 군사 공조를 맺었으나, 이틈을 타 야금야금 남부여의 동변을 공략하는 신라의 이중적인 태도에 분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구려가 대륙 동북방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돌궐 문제로 한강 이남 공격이 주춤할 때, 남부여 성왕의 명을 받은 태자 창이 기습적으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한편 이 싸움에는 남부여 군대 외 가야와 왜병도 출전하였다. 특히 가야의 영역은 금강 상류(지금의 충남 금산 일대까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낙동강 서안과 금강 상류를 노리는 신라군에 맞서 가야군도 참전한 것이다. 실제 관산성 전쟁에는 남부여군 측에 가담한 총 병력의 60% 이상이 가야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필자는 금산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핏골 전쟁은 가야군이 주축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의 대전-옥천은 남부여의 영역이었지만, 당시 금산과 무주, 장수, 진안 일대는 가야의 영역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특히 금산의 고분에서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가 출현하고 있으며, 장계 침령산의 봉수대에서 금산까지 봉화망이 연결되어 있어 이러한 추론을 확증케 한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산성전쟁이 신라, 남부여, 가야 삼국이 벌인 국제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왜군은 남부여 왕가와 일정한 관계가 있어 물자 보급 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참전의 의의는 크지 않다.
<삼국사기>가 핏골전투를 기록에서 제외한 것은 가야의 역사가 삼국사에 흩어졌기 때문이며, 이는 백제의 부수적인 부문으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오인한 까닭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핏골산성은 대가야 세력이 초축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핏골전쟁의 패배로 산성의 주인이 바뀌는 사이 그곳은 신라의 산성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신라의 삼한 통일 이후 핏골산성은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하고 퇴락하고 만다. 어느덧 공간이 역사적 의미를 상실하자, 그 골짜기에는 가야군과 남부여군의 희생만이 전설처럼 전해지며 그 살벌한 이름 '핏골'만이 남게 되었다.
설렌다. 허나 그 산성을 바라보는 순간, 내 전생의 카르마와도 관련이 있는 듯이 산성이 압도한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염을 올린다. 끈적끈적하다. 그건 눈물일까?
산성처럼 매력있는 장소가 있을까? 다시금 깨닫는다. 그냥 그곳이 좋다.
참고로 <전국문화유적총람>에는 영동 '장군봉성지'로 나와 있다. 그것은 '핏골산성'이 대음지산 정상부인 '장군봉'에 있기 때문이다.
* 영동 장군봉성지(將軍峰城址) *
주 소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용당리, 각계리
지정사항 : <지정사항 없음>
시 대 : 삼국시대
종 류 : 성곽 보
참고사항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상 ; 청주대학교 박물관, 1992, <<영동군 문화유적>>, 41.
금강 상류 양안을 국경으로 한 신라,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거의 붕괴되어 있으며 심천면 용당리와 각계리 사이 해발 318m 속칭 슨지폭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으로 마을 동방 1km 지점인 용소곡 대음지산정 장군봉에 있다. <<문화유적총람>>에는 “둘레 300m 정도인데 자연석으로 난층 쌓기로 쌓은 석축 일부가 남아 있고, 대음지산 서록에 도기 파편이 산재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산 정상부에 2기의 민묘 주위의 약간의 토루 흔적이 있을 뿐으로 산성의 유지는 거의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삭토한 흔적과 좁은 평지가 있고 기와편이 약간 수습되어 옛날 군사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이며 그 축조 시기는 단정하기 어렵다. 대략 남서족으로 펼쳐진 평야와 옥천 방면의 옛길, 그리고 금강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소규모 보루로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동군 심천면 용당리에서 용당저수지로 들어가면 바로 핏골산성이 보인다.
전형적인 산봉형 산성이다.
저수지에서 바라본 산성은 너무도 아름답다. 과연 저곳에서 1500년전 삼국의 군인들이 그토록 피를 흘렸단 말인가?
봄을 가장 빨리 아는 이들은 강태공들이다. 벌써 붕어 낚시가 시작되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잡풀을 헤치고 오를 필요는 없지만, 약간은 삭막하다.
금강이 보인다.
좌측으로 봉수대가 있는 이원면 월이산(551.4m)이 보인다.
금강 너머 반도처럼 튀어나온 동네가 심천면 고당리 날근이이다.
산성의 서벽
좌측 너머 서대산이 큰형처럼 동생 월이산의 어깨를 넘어보고 있다.
가까워 보이지만 워낙 된비알이라 호흡은 가쁘다.
핏골산성은 이중성의 구조를 갖고 있다. 남쪽의 제일 높은 장군봉은 테뫼형으로, 북쪽 낮은 능선은 산봉형으로 구축해놓았다. 장대지와 건물지는 남쪽 장군봉 정상에 집중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북쪽 능선은 좁아 초축 이후 필요에 의해 산성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동쪽으로 영동읍이 보인다.
북쪽 능선 끝자락
북쪽 능선 끝자락에서 바라본 남쪽 능선
북쪽 능선 끝자락의 평탄지
북쪽 능선 끝자락에 토석혼축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쪽의 영동읍 일대
북벽에서 바라본 동쪽 일대
석축의 흔적
북벽의 석축 흔적
산성의 외형은 확인되나, 석축이 아니라서 구별하기 어렵다.
산성 내부
산성 내 민묘
북쪽 능선은 좁다
황간면의 월류봉으로 사료된다.
산성 내부로 남쪽 장군봉으로 가는 길이다.
능선을 지나면 오르막이 나온다. 아마도 남쪽 장군봉에 테뫼식 산성을 먼저 쌓고 이 지역이 국경선으로 고착되자 북쪽 능선까지 산성을 확장한 듯하다.
남쪽 장군봉 부근은 제법 넓은 평탄지가 나온다.
동벽으로 경사가 심하다.
회곽도일까?
장대지 부근에 민묘가 자리하고 있다.
장대지 남쪽 아래
콘크리트 계단을 시설해 놓았다.
장대지 아래 평탄지
두번째 콘크리트 계단 시설. 이곳이 남벽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남벽
남벽 아래 남쪽 능선으로 내려가는 산책로
답사를 마치고 하산길은 각계리 핏골로 정했다. 핏골로 내려오며 혹 이후 답사자들을 위해 핏골부터 시작하는 답사로를 설명하고자 한다.
각계2리 핏골 입구인 지계리에 주차하면 교회 첨탑 너머 핏골산성이 보인다.
우측 하천변 길을 따라 걷다보면
경로당 겸 마을회관이 나오고
경로당 옆 좌측길로 가면
핏골산성이 보인다.
농원 앞에서 우측길로
푸른 지붕 창고 너머로 핏골산성이 보인다.
핏골산성 전경
사당있는 집이 보인다.
사당 옆 좌측 길로 오른다.
핏골산성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낸다.
산소 옆 좌측길로
좌측으로 영동읍이 보이고 아래는 각계2리(경부고속철 아래 마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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