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일
이 고장이 낳은 전통산수화의 대가 남농 허건(1908∼1987)화백(畵伯)이 가신 지도 벌써 올해로 만 15년이 되었다. 그분의 생존시에는 표구점에만 가도 그 분의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지냈는데, 이제는 남농기념관을 찾거나 향토문화관에 가거나 그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의 호의에 의하지 않고는 시내에서 그 분의 그림을 접하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그분의 작품애호가에게는 기념관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나 같은 사람이야 그림을 제대로 감상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저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그 방면에 손방이다 보니 그분의 그림에 관해 외람되이 어떻다고 말할 처지는 아예 되지 못한다.
마음이 끌리는 그림 한 점이라도 가까이에 두고 늘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한가할 때면 가장 손쉽게, 화집(畵集)을 꺼내놓고 감상 아닌 감상을 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산수화(山水畵)의 경우, 화찬(畵讚)을 읽고 그 내용과 그림을 음미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고 어느새 나 자신이 그 속에 잠겨 들게 된다. 말을 좀 보태면 화아일체(畵我一體)라고나 할까.
또 화찬의 필치도 살피고, 다른 그림과 견주어보고 있노라면 더할 수 없이 마음이 풍성해진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추사 김정희선생을 비롯해서 '서캙화가들이란 참 여러 가지 아호를 쓰는 것이로구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남농화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화집을 바탕으로 어떤 아호를 얼마동안 썼는가를 정리해 보기로 했다.
이것을 하기 위해 참고한 화집과 거기에서 자료로 이용한 그림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화집명-발행처-화집의 간행 연도-수록된 그림 중 자료로 이용한 그림의 숫자)
남농허건화백 초대전 도록--------------신세계미술관----1977-----28.
한국현대미술전집3 현대한국화명작집--한국일보사출판부----1978-----11.
운림산방화집-----------------------전남매일신문사----1979-----59.
남농허건화집 --------------------------동앙일보사----1980----141.
남농허건화백 그림과 수석 ----------------(주)바른손----1982-----9.
남농허건1주기 추모전 도록---------------남봉미술관----1988-----11.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7----------------금성출판사----1990 ----16.
소치일가4대화집 ---------------------------양우당 ---1990 ----52.
향토문화관 소장품선------------------------목포시----1992 -----7.
남농기념관 소장품선 --------------------남농기념관----1998 ----33.
총 계 = 367점.
이상 10권의 화집에서 그 작품에 간지(干支)나 기년(紀年), 그리고 아호(雅號)가 분명히 확인되는 367점의 작품만을 자료로 삼았다. 따라서 그린 연대(年代)가 거의 짐작이 되더라도 간지나 기년의 표기가 없는 것은 부득이 자료에서 제외하였다.
보덕굴(普德窟)이나 조춘고동(早春古洞)처럼 한 그림이 여러 화집에 거듭해서 수록된 경우는 그 그림에 대한 가치나 작품성을 여러 사람이 다같이 인정했다고 볼 수 있겠기에, 그만큼 비중 있는 작품이라 생각하여 중복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병풍의 경우 일지병(一枝屛) 같은 대작도 하나로 쳤고, 각 폭(幅)마다 아호가 다르고 별개로 낙관된 것은 각 폭을 하나로 보았으며, 부채에 그린 선면화(扇面畵)도 작지만 하나로 세는 등 작품의 크기에 상관없이 아호에 따라 별개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남농산인(山人)과 남농산인(散人)은 음은 비슷해도 그 뜻이 다르기에 구분하였으나, 수석(水石, 壽石)산방은 한자(漢字)만 다르지 남농화백이 생존할 당시 수석(水石)과 수석(壽石)이 넘나들어 쓰인, 같은 말이라 보고 구분하지 않았다. 또 정사(丁巳=1977)년에 그린 그림의 아호 다음에 희(稀)자를 쓴 것은 고희(古稀) 때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 별개의 아호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밖에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주관적인 해석이나 자의적(恣意的)인 분류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것은 적어도 화집에 수록된 정도의 작품이면 그림에 대한 안목을 갖춘 이들이 그 작품의 가치나 작품성을 공인한 그림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필자와 같이 그 방면에 손방인 사람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어떻게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료를 연도에 따라 아호 순으로 배열하였다. 이렇게 자료를 정리한 다음, 쓰인 아호의 종류와 그 수 및 무슨 아호를 어느 연도에 즐겨 썼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동일 연도에 중복되는 같은 아호는 여럿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하나씩만 남기고 없앤 다음 통계를 냈다.
그러나 부수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 시기에 비중 있는 작품이 얼마나 그려졌는가를 대충 가늠해보기 위해서는 같은 연도에 중복되는 아호에 상관하지 않고 합산해서 통계를 냈다.
그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화집에 실린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한(限)에서는 남농화백이 처음 쓴 아호와 그 시기는 선전(鮮展)에 처음 입선한 해이기도 한 1930년에 본명과 함께 쓴 남농거사허건(南農居士許楗)이며, 마지막으로 쓴 아호는 화제(畵題)는 적포조어(荻浦釣魚)이고 정묘(丁卯) 하(夏) 남농(南農)이라 적고 낙관(落款)한 부채그림인 것을 볼 때, 1987년 여름의 남농에서 끝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하지만 남농화백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이의 말에 따르면 1987년 여름 입원하기 바로 전에 공들여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아마 그것이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 그림은 정 모씨 손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화집에는 실리지 않았으니 볼 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
그리고 1930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32년과 한국전쟁이 일어난 50년의 두 해를 빼고는 해마다의 작품이 화집에 실려있다.
그러나 1964년 이후에는 작품이 화집에 수록되지 않은 해가 자주 나타난다. 그것은 64, 68, 70, 72, 76, 82, 85, 86년의 여덟 해이다. 이것을 연도별 일람표로 제시했으면 좋겠으나 지면이 허락되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1982년 이후는 노령 때문이라 하더라도, 항간에 전해지기로는 아주 많은 작품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1970년 전후의 그림이 화집에 드문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분의 연보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 국전 심사위원 등 대외 활동이 많았으니 자연히 작품활동에 전념하지 못한 때문이었지 않나 짐작해볼 따름이다.
그렇지만 연보, 기타의 기록 및 증언 등 여러 상황을 종합할 때 1930년 이후 실로 5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입원하여 수술 받은 해나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활동을 계속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가령 남농외사, 운림산방주인남농외사와 같이 그 사용시기나 아호의 성격이 비슷할지라도 한 글자만 다르면 다른 아호로 간주하고 따져보니 생애를 통해 사용한 아호의 수는 모두 스물다섯 가지를 헤아린다.
그 중 세 번 이상 즉 3년 이상 쓰인 아호가 여덟 가지이고, 2년 동안 쓰인 것은 일곱 가지이며, 한 해만 쓰고 만 것도 열 가지나 되었다. 특히 화집에서 한 작품에만 나타난 아호도 여덟 가지나 되었다.
아호의 종류와 그 쓰인 빈도, 아호가 쓰인 기간을 쓰기 시작한 연도순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호 다음의 괄호 안 숫자는 그 아호가 화집에 나온 총계이고, 쓰기 시작한 연도에서 마지막으로 쓰인 연도까지의 길이는 대충 그 아호가 쓰인 기간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남농거사허건(1)- 1930
남농허건(14) ---- 1931~~~~~~~~43
남농(131) -------- 1933~~~~~~~~~~~~~~~~~~~~~~~~~~~~~~~~~~~~~~~~~~~~~~~~~~~87
허건산인(散人)(2)--- 1934
남농산인(散人)(10)-- 1934~~~40
남농허건산인(散人)(1)- 1937
남농산인(山人)(3)----- 1938~39
철산인(鐵山人)(1)----------- 1941
남농인(10) ------------------ 1942~43
운림산방주인남농인(2)--------- 1943~~~~47
운림산방주인남농(67) --------- 1943~~~~~~~~~~~~~~~~~~~~~~~~~~~77
운림산방주인(2)---------------- 1944~45
남농외사(25)----------------------- 1946~~~~~55
운림산방주인남농외사(39) ---------- 1946~~~~~~~~~~~~63
운림산방남농(33) --------------------------------------------- 1973~~~~~~~~~~~~80
운림산방주인농옹(1)------------------------------------------------------ 1977
남농옹(2)---------------------------------------------------------------- 1977~~~~80
적취(積翠)산방주인남농(1)-------------------------------------------------- 1978
벽계청장관(碧溪靑 館)주인남농(5)--------------------------------------------- 1979~80
수석산방남농(4) -------------------------------------------------------------- 1979~80
수석산방남농옹(1)---------------------------------------------------------------- 1980
벽계청장관남농(1)---------------------------------------------------------------- 1980
벽계청장관남농옹(5) ------------------------------------------------------------- 1980
적취산방남농(1)------------------------------------------------------------------ 1980
운림노인남농(5)------------------------------------------------------------------- 1981~~84
작품총계=(367)---------------------------------- 작품활동기간=58년
위에서 보건대 가장 오랫동안 쓰인 아호는 말할 것도 없이 남농(南農)으로 1933년에 쓰기 시작하여 1987년까지 쓰였고 사용빈도도 가장 높다.
그 다음이 운림산방주인남농(雲林山房主人南農)으로 쓰인 빈도도 남농에 버금간다. 그 다음은 운림산방주인남농외사(雲林山房主人南農外史)이다. 이 세 아호의 사용빈도가 전체 그림의 약 65%를 차지한다.
만년(晩年)에 색다른 아호들을 잠깐잠깐 쓰기는 했지만 남농화백의 아호의 기축(基軸)을 이루는 것은 단연 '운림산방'과 '남농'이라는 두 낱말이다.
그리고 다른 아호는 연대(年代)에 따라 거기에 '거사(居士), 산인(散人), 산인(山人), 인(人), 외사(外史), 옹(翁), 주인(主人)' 등의 접미어가 덧붙여져 있다.
또 한해에 가장 여러 가지 아호를 쓴 것은 1980년의 9가지이고, 1943, 1947, 1977년에 5가지, 1934, 1946, 1951, 1955년의 네 해에는 각각 4가지씩의 아호를 쓰고 있다. 이것은 1980년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남농허건회고전 출품을 위해서이고, 1977년에는 신세계미술관에서 가졌던 남농허건화백초대전 출품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밖의 해에는 왜 그랬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 왕성한 작품활동 때문이 아닌가 짐작한다.
그런가 하면 한해에 한가지 아호만 사용한 해도 십 수년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초기 작품에는 본명 허건(許楗)을 아호와 병기하고 필(筆) 또는 근필(謹筆)이라 적은 것이 보이고, 특정인이나 기관을 위해 그린 작품에는 법정(法正), 정지(正之) 또는 근작(謹作)이라 쓰인 겸양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낙관(落款)을 마무리한 부분은 아호만으로 끝맺은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작품에 따라서는 아호 다음에 '…작(作)'이라 적은 것을 으뜸으로 그 쓰인 빈도가 사(寫), 사차(寫此), 작지(作之), 화( ), 작차(作此), 사지(寫之), 필(筆) 등의 순으로 끝맺고 있으며 그것도 연대에 따라 그 쓰임이 바뀌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화집에 나타난 것으로만 보건대 작품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1940년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의 16∼7년 간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상 남농화백의 화집에 나타난 것을 바탕으로 아호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 분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아호를 정리하면서 느낀 것은 작품의 연대 표기는 거의가 간지(干支)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겠는데 일제 강점기 말인 1943년에 목포 근교인 듯한 곳에서 보리 베기를 하고 있는 것을 그린 그림에서는 서기 연호를 쓰고 있는 것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지금에서야 서기 연호를 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일제말기 심지어 학교에서의 영어교육도 폐지하고 귀축미영(鬼畜米英)이라면서 미국과 영국을 적으로 돌려 사갈시(蛇蝎視)하고 서구적인 냄새가 나는 일체의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발악을 하던 그 엄혹한 시기에 하필이면 간지를 쓰지 않고 다른 것도 아닌, 일반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지냈던 서기 연호를 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제삼 확인해 보았다. 틀림이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드러내놓고 반일(反日)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속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한 해석이 될까.
일제 강점기 우리 화단(畵壇)을 이끈 내로라 하는 동양화가이고 서예가였던 이 가운데 일본 국왕의 연호인 대정(大正)을 쓰고 낙관한 그림을 보고 역겨웠던 것과 비길 때 한 차원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도 남농 화백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한 속뜻도 어렴풋이나마 이해되며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수긍이 갔다.
끝으로 전체 남농화백의 그림을 통해 느낀 것은 초기의 그림에서는 시야를 좁게 잡은 대상을 섬세한 필치로 오밀조밀하게 화면 가득히 채웠으며 화제나 아호에서도 겸양이 묻어난다면, 중기의 그림에서는 자신감과 활기가 넘쳐나고 시야가 넓어지고 그림에 여백(餘白)도 많아졌다. 그리고 이 고장의 산천과 물과 섬을 있는 그대로 사경(寫景)한 것이 돋보인다. 따라서 이 시기 이 고장의 산천과 물과 섬은 남농화백 산수화의 어딘가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내 고장 사랑의 한 면모이리라.
이어서 후기에는 개성적인 거친 선과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거칠 것 없는 필치로 평생 마음에 간직했던 생각을 속 시원하게 펼친, 사의적(寫意的)인 산수를 그렸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노화백의 독보적인 노송도(老松圖)를 통해서는 풍우(風雨)와 설한(雪寒)을 이기고 우뚝 선 청송(靑松)과 같은 지나온 삶과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을 자신의 내면 세계를 극명하게 형상화(形象化)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목포문화사랑> 2002년 7월호 PP.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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