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눔의 담배는 옆순이 따면 금새 또나고 하는데
그런데도 계속 따내야한단다.. 그래서 담배를 본격적으로 수확하기 전까진 수시로 옆순을 딴다
한고랑에 한명씩. 엄마 큰누나 작은 누나 그리고 나 까지 네명이. 한번에 네고랑씩 옆순은 따나가는것인데.. 덥기도 하고. 힘도드니.. 그더운 고랑에서도 나름 담배잎 밑 그늘에 숨에 짱박혀 한숨. 때리기도 한다 그래봐야 한 오분 십분일것이다
그러곤 나름 몰래 한숨 잦다고. 흐뭇해선지..일손이. 늦어서인양.. 힘들다며.. 징징되본다
저녁 이 가까와오면 학교누나(나는 당시에 둘째누나를 학교누나라 불럿다)는. 먼저 집에 갔다
누나는 먼저 가서 저녁밥을 준비해놓는 임무를 가졋는데...밭일을 하는 우리에겐 그게 매우 부러웟엇다
누나가 가고도 한 두세시간을 더일을 하곤 껌껌해서야 엄마는 집에 갈생각을 햇다
그시절엔. 땀에 젖은 몸을 골짜기 개울에서 목욕을 하곤 마무리 하곤 햇엇다
집에 갈때쯤되면 나는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데리고 와서 엄마에게 대령하는게 일이고 엄마는 소를 다시 리어카를 개량한 달구지에 소의 등에 묵인 안장과 같은 곳에 연결시키면. 우리. 남매들은 달구지에 누워 흔들 흔들 하며 금새 잠들기도 한다
얼마뒤 다왓으니 내려라..함. 집에 온거구
학교누나가. 준비해둔 저녁밥을 맛나게 먹 고는 하루 일과가 끝난다
일요일은 아침부터 .. 온식구의 일정이 이런식인거구
학교가는날은 학교마치고. 집에 책가방을 두곤 밭으로 가곤 햇다 엄마는 아침부터 혼자서 밭일을 혼자 매일 하셧고 ..우리들은 그런 와중에도 이런 저런 핑계로 . 농땡이를 피엇고. 언제부터인가는 집에 소가 3~4마리가 되고선 나는 학교마침 소를 떼기는것이 주임무엿다
강변에 소를 풀어두고는 형들하곤 야구며 씨름 수영등을 하다가 어둠이 올때쯤됨 소를 찿아. 집에 오는것인데 손 한마리를 몰때는 고삐를 잡고 모나
소가 여러마리 일때는 고삐를 짧게 둘둘말아 소의 목에. 흔들흔들. 두어서 끈에 소의 발이 걸리지 않게 한후 뒤에서. 몰이하듯 집까지 데려오면 되는데 소들도 매일같이 익숙하니..잘들한다만 길목마다 벼논들이라 소들은 벼만 보면 환장을 하기에 그럴때마다 엉덩이를 한대씩 때리곤 하며 집까지 온다
가끔은 그것도 귀찮고 재미도 있어 소등에 올라타고 오기도 햇다.
어른들은 소가 등뼈가 의외로 약해 타는걸 봄 혼나기에 집근처에서 내리면. 되엇다..
그시절엔 그때 엄마와 가족들이 밭에서 아웅다웅하던시절이. 정말 힘들고 언제 벗어나나 햇지만..실상은. 그시간이 오래 유지되지도 않앗다 중학생이되고 ..막내인 내가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가고는. 누나들은 도시로 나갔고 학교누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그시절도. 대부분 고등학교를 갔고 혹여 형편이 어려움 구미같은곳에 산업체 학교들에 가서 일을 하며 진학하기도 햇고 농고에선 여학생을 유치하기위해서 여학생에겐 전액장학금으로 유치하기도 햇엇는데
엄마는 학교누나는 끝내 고등학교를 보내지 않앗다
대신에..그를 대전에 있는 미용학원에 등록시키고 기차를 타고 통학하게. 하엿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엄마가 둘째누나를 고등학교에 기를 쓰고 가는것을 막은것은.. 큰엄마딸인 큰누나가. 우리랑. 초등학교까지 함께 살앗는데
6학년 겨울방학때. 서울이모(큰엄마 동생)가 내려와 큰누나를 데리고 가면서. 집안일을 맏기곤 대신 중학교를 보낸다고..햇기에...당시 상황이 어렵기늘 햇어도 엄마는 서울에 올라가 다시 데려와 중학교는 보내 주겟다 햇던것 같은데
당시 울 식구모두 서울에 큰누나 데리러 같이 갔엇는데. 가보니 나라도 다시 내려오긴 쉽지 않앗을것이다.. 울집에선 흰쌀밥은 구경도 못햇고
꽁보리에 쌀을 쬐금 썩은 밥이엇고 반찬이라봐야
배추김치,무우김치..호박볶음. 가지등이엇지만 서울 이모네 가니. 오뎅반찬에 계란후라이.콩자반.쏘시지전등 ..우리완. 레벨이 달랏다..결국 큰누나는 그곳에서 눌러 앉앗는데
그것이 학교누나를 고교진학을 막은것이다
나름. 이복인 큰딸 은. 초딩만 마치고 서울 이모 밑에서 중학교까지만 마쳣는데. 자신이. 배아파 난딸이라고 .한살따올인데 고교진학을 시키는게
부담을 느끼신듯 하다.. 실제 대전으로 미용학원 보냇던것도 비용은 만만치 안앗던것을 감안함. 더욱 그렇다..아직도 학교누나가 밤에 엄마한테 농고보내달라고 농고는 학비도 안든다며..울면서 애원하는데 엄마는. 끝내. 당시론 어쩜 돈이 더드는 대전의 미용학원에 보냇다.. (그덕에 사실 누나는 어쨋든 그 기술로 평생을 먹구살고 있으니..엄마의
차선책은 나름. 누나에겐. 나름의 살길을 열어주긴한듯)
어찌됫든. 자슥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농사일듬 그런일은 오로지 엄마의 혼자만의 일이엇던것이다
그러다보니 엄마도. 혼자 힘겨웟는지..밭을 팔고 집가카운곳에 논을 얻어. 농사를 짖기는 하셧어도
그시절부터는 가발.식당.일,청소일등을 찿아 일을 하시곤 하엿다..
당시만 해도 울엄마는 원래부터 못살앗던집 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생고생하는것으로 알앗다
허나 최근에. 엄마가 4.3 사건당시 고아가 된것을 알앗고. 관련기록들을 찿다 보니
1947년 중문지서 순경이엇고 일제시대 일본본토에 가서 중학교까지 다녓다는 부잣집의. 딸이엇고 제주 애월 고성리에늘 엄마의 외삼촌이 일제시대에. 나름 지역에서 몇명만 차출되에..잘은 몰라도 나름 ..전쟁에서 죽엇다고. 동네에 용사비같은것이 세워져 있는데 그동네엔 하나뿐. 인것처럼 나름 외가 친가 모두 나름 꽤 사는 집이엇다는걸 알앗다..
47년도 삼일절 행사에서 경찰의 총격에 시민둔이 죽는 일로 .. 시민들이. 책임자처벌과 사과요구가 거셀때. 강경일변도 진압명령을. 거부하며
금일까지 경찰본분을 지키기워해 최선을 다햇으나
금번 총겹사건으로 인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엇다
그러므로 더이상은 악독힌명렁에 따를수 없으니 금일부로 사포를 내고. 중문지서원 6명은
경찰을 떠난다는 게시글을 남긴게..(당시 주요신문에 게재됨).것이 빨갱이로 몰려 가족들카지 모두 죽임을 당햇고 혼자남겨진 다섯살 어린 울엄마..를 누구하나 챙겨주는 이도 없고 스스로. 부모들의 재산을 지킬수도 없이 빈손으로 쫗겨나듯 제주에서 열다섯에
떠나왓던것을. 최근에서야.. 알게된 사실이다
두서없지만 울엄마의 삶의 기록을. 이래라도 남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