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예전부터 강씨.문씨.양씨.고씨 등의
성씨들이 많이 살앗다
해방직후 제주에선 너무 많은사람들이 군경등에
죽어..심한경우는 가족전체가 몰살되거나 고아가 되어..겨우 생존한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원체 암울한 시기를 격엇던. 한국근현대사 였기에..제주에서 불행을 격엿던 가족사를 은연중
잊고 계신 분들도 있고..고향을 떠난지 오래된 분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사망한지가 워낙 오래됫고. 또 어린 아이시절 일들로 가족 관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실제 나의 어머니께서도 5살때 고아가 되엇고 오빠 이름을 겨우 기억하나 간난장이이고 호적에도 못올린 동생은 이름마저도 기억하지 못하고 계셧고
본인의 엄마 아버지만 겨우 4.3. 희생자라곤 말하셧는데..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족콴계등을 살펴보니
아버지.엄마 이모 외조부..간난아이 남동생
이 49년 죽임을 당하셧고 네다섯살위인 오빠도 정신병을 앓다 55 년에 사망하셧다는데..결국 오빠도 8 세쯤된 당시 가족들이 몰살되는 사건을 격으며 정신병이 걸려 사람만 보면 도망가고 어린 동생이 멀리서 오빠하고 불러도 도망쳐 숨곤 하다
15세 정도에 창고같은곳에 숨어있다 갖혀 굶어죽엇다고 한다..
그런 사정을 21~22년경 어머니께 듣고 희생자로 신고도 할생각도 못하던. 출생신고도. 안되어 호적에도 없는. 이름도 모르는 동생과. 4.3사건 기간으로 특정하고 있는 54년도 9월인가. 보다 이후인 55년도 사망한 오빠도 희생자등록신청을 해서 2년정도 심사기간을 거쳐 희생자로 인정받앗다
그리고 이모와 외조부는 2000년대 이미 희생자로 등록된것을 4.3평화재단 희생자명단을 어머니 고향의 희생자명단자들중 일일이 대조한끝에
이모와 외조부가 이미 희생자 등록됨을 알고
어머니도 유족대상임을 확인하엿다..
지금으로 개인적으로 법적인부분등에 관심이 많앗기에.. 어머니 가족피해사건 관련 당시 기록이나 증언자로ㅡ등을 찿아나 8~9명의 49년당시 고향마을 살앗던 분들의 증언기록을 확보하엿고..그걸 근거로 단순 특별법(과거사에 대한 아픔을 포용한다는 즉면에서 군경뿐아니라
4.3사건당시..무장대나..4.3관련 사고사등도. 폭넓게 희생자로 인정하고 보상을 하기에 반대로 최소한 의 보상을 하고있다)이 아닌 국가배상소송이나 형사배상소송(가능할수도 잏긴하나..당시 재판기록등이 없기에 당시 체포되어 끌려가 며칠 구금후 총살당함으르 재심청구 여지 검토하나 어려운 숙제)쪽을 검토해 명확히 군경이 무고한 비무장상태의 국민을 죽인것. 그것도 간난아이포함 가족들을 한번도 아닌 세번에 걸쳐 한두달 간격으로 몰살시킨
반인륜적이고 흉악하며 단순 사고가 아닌 장기간 계획된 국가범죄 피해측면으로 국가배상쪽을 검토하고 있다. 제일중요한 범죄사실입증이엇는데 당시 다섯살 꼬마엿던 어머니 주장만으론 명백한 사실임을 증명됫다고. 하긴 힘들엇는데. 2~3년간 찿아낸 과거의 증언기록(지금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신문사 빙송사..출판물.관공서 등에. 남긴 증언들)을 확보햇기에,.가장힘든 부분은 해결됫다
어쨋든 이미 80 세. 에서 90세 정도되신 부모님들중 제주도에. 외가나 본가 또는 본적 등이 계시다면 잘모르심 고.양.문.강 씨등이 제주도 에 많은 성씨 이니 한국사나 세겨사가 아닌 본인들의 가족의 역사 에도 관심을 가져보시기를.. 참고로 제주도 특별법에 의한 보상 청구 대상중 20퍼센트 정도는 신청을 하지않앗다는 뉴스가 있기에..블로그에도 관련정보를 언급해본다
원래는. 희생자 유족이나 신청대상자들에게 정부나 제주도에세 우편물등으로 통보를 하는것으로 알고있으나..누락되거나 보냇으나 전달이 안되고 잊어진 경우 아예 연락처가 없는 경우등..다양한사유로 신청대상자들이 자신이
희생자 유족이나 보상신청대상자임을 모르고 있는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가족살 공부히면서 가족사와 한국근현대.그리고 세겨사가 서로다른것이 아닌.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모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직접 느낄수 있는 경험이 되엇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바로 사실을 바로 잡을수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하고 그런 행동이 모여 결국 한국사(4.3사건이 본격화 되기전인 47년 3월. 부터 이미 경찰 지휘부는 제주를. 붉은섬. 제주도민의 90 퍼센트는 공산주의자들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있엇다.. 그이유는. 일단은 미국이 사이좋게. 소련.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일본 독일과 싸워. 전쟁에서 승리함에. 도취한 사이 동유럽이. 전쟁도 없이 공산화되며. 소련의 위성국가가 된것에. 충격받은. 미국이. 빨갱이
에. 대한. 노이로제 수준의. 충격을. 격고 있던 시기 엿던게 당시. 미군정하의. 경찰 지휘부에도 영향을. 미쳣을거구. 아울러. 당시 경찰지휘부의 대부분은. 일본고위경찰 출신들이엇고. 당시 임정출신. 정치인들은 미군정. 이후를. 준비하며
반민족행위자 청산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공공연히 군정이후. 친일청산이. 있을것을
주장하던 시기 엿고 아직 그들에겐 실질권한은 없던 시기이기에. 친일고위 경찰들에게. 저눔 친일파 죽여라 대신. 새로운 나쁜눔이. 필요햇으니. 마침 미군들의 빨갱이 나쁜 눔 이
딱 떠올랏기에. 이해관계가. 딱 맞앗다..실제 미군정후. 반민족특위가 있엇으나..그것마저 친일경찰지휘부는. 저눔 빨갱이. 죽일눔으로 깡그리 깨부심. . 뉴스는. 뉴스로 덮어라는. 방식이. 이미 이시기부터. 활용한 전술인듯..친미. 이승만 대통령 49년1월21일 국무회의에서. 당시 한창 제주와 전남등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되는. 시기엿음에도. 미국의. 원조확대를. 위해서는 전남과. 제주에서. 더욱 가혹하게 다뤄야 할것이라고 지시한다)와 세계사중 외곡된곳이 바로 잡힌다는 인식을 갖게 되엇다
참고로 나는 지금도 열심히
제주 중문지서 에서 사표내고 입산해서 무장대가 되엇다는. 유언비어의 나의 외조부(강수헌)께서
47년당시. 삼일절기념행사에서 시민들을 경찰이 5~6명을 총으로 죽이고 항의하고 책임자처벌과 사과등을 요구하는 시민들에 강경대응 일변도의 경찰지휘부의 명령에 따를수 없음을 밝히고(당시 신문기사.경찰기록등) 정식으로 상급기관인 경찰서장에 사표를 제출하고 떠낫는데 (당시 제복을 보름내에 제주본청(부)인지에 반납하라는 지시도 받앗다고 함) 일개월뒤쯤 사직이 아닌 파면하고 파업(참고로 파업을. 현직들만 할수있는 특권인데 퇴직한 경찰이 무슨 파업을 햇다고)을 햇다고 체포령을 발령하고 쫒아기에..당연히 살고자 도망한것뿐이고..굳이 무장대가 됫담 사표가 아닌 무기를 갖고 도망 갔겟지...그리고
2년여간 쫒다 가족들을 죽이고 얼마뒤에 경찰에의해 죽임을 당할시점도 도피중집에 간만에 밤에 딸을 보러 와서 잠을 자고 새벽일찍 나서려는데. 고향친구이면서 아직경찰인 친구가
집을 찿아와 지서주임이 전근을 가는데 한번 만나 사정예기를 함 도움을 받을수 있을거라고 해서 체포되서 나간것이 아닌 그냥. 친구랑 햠께 나간이후 행불되엇고 나중에 친구가 경찰들에 죽엿다곤 햇으나..시신은 돌려주지않앗고
그분도 동네 초상집에 왓다 깁자기 죽어 70여년 지난 지금도 유골도 못 찿은 상태다
4.3당시 중문지서의 5~6명의 경찰관 전원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경찰로써 그들에게 총을겨눌순 없다며 시직한 사실을 제주사회엔 알려진 사실이나 그로 인해 그들중하나는 가족들이 6명이나 죽임을 당한것을 알려지지않았다,(그리고 어머니 기억으론
자신의 부모가 도피중일때도 동네에 잔치나 초상등에는 가끔들렷고. 그러면 같은 동네 출신 경찰들과는 만나기도 햇엇다고 한다. 문제는 육지에서 파견온 경찰이나 사람들이 무섭다곤 햇다고 기억) 각각의 사건이지..서로 퍼즐이 맞추지 안았기 때문이기에..일단 내가 퍼즐을 맟 추는 일을 진행하고자 제주도. 평화재단.경찰청.법무부 등에 이곳저곳 커뮤니케이션 해보지만 오래전일이고 정작 책임질 사람들은 모두 사라졋기에.. 쉽지는 않으나 이런 글쓰기 등도 나름 알리고 부딪히는 한방법일것이다.











첨에는. 외조부인 강수헌님이 중문지서 경찰하다
삼일절행사에서 시민들이 경찰총격에 죽임당하며
그사건 관련 부락민들의 항의가 심해지고 위에선 총이라도 쏴서라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사표를 냇다가 빨갱이로 몰려 온가족이 죽음을 당햇다는 당시 혼자살아 남은 다섯살 꼬마의 기억들이 정말 사실일까 너무 오래되엇고 기억이란게 외곡될수도 있기에. 중문지서. 사직 에대해 자료를 찿아보면서 하나둘 관련 자료나 증언기록들을 찿아내어 현재는 가족들이 경찰들에 의해 죽임을 당햇다는 과거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증언기록들을 약 10 명정도의 증언자의 증언기록을 확보하게되엇고
당시 경찰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임의로 총살시키며 제대로된 기록도 안남겻다는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 자료도 확보햇기에..현재 경찰에세 관련사건기록이 없다는. 이유도 진상조사보고서 기록을 빌면 설명이 된다
가해자는 완전히 잊어먹엇는데 희생자유족들만 평생 아픔을. 격은 것인데 그걸 그냥 남겨진 유족한명의 기억과 주장만으론 객관적사실화가 쉽지않기에 가급적 많은 특히 신문 방송등에 남겨진 증언들을 찿는데 주력해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