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이봉창의거 의 충격파는 ?
이봉창의거의 영향력은 한중일 삼국에 어마어마햇다
의거일 1932년 1월 7일.
장소. 일본황궁 근처
내용. 천황이 탄마차에 폭탄을 던졋다(실상은 천황이 경호목적으로 마차한대를 앞세웟는데 바로 앞의 빈마차에 던진것이고. 폭탄위력이 세진않앗다
당시 현장상황.. 우왕좌왕히던 경찰들이 근처에 있던 일본인이 던진것으로 알고 체포하는데.. 이봉창의사가 가오가 있엇던지라..잠깐만요
내가 던졋는데요 라며 엄한사람 잡지말고 자신을 잡이가라고..
당시 동북아 정세는. 만주인근에서 한중 농민들의 충돌로..인한 한중. 모두에선 서로 한국인 중국인들을찾아 죽이는등 한중 관계가 최악..이엇다 그런것에는 만주에서의 충돌을 확대재생산하며 언론에 대서특필햇던 총독부의 입김 잎김이 작용한 측면이 강하다
더구나 어쨋든 일본은 조선인들도 자국민이라며 그들을 보호하겟다는 핑개로 만주를 공격 차지한것이니..중국내 임정활동은 개점휴업상태. 엿는데..이봉창의사가. 일본인들의 하늘인 천황에 폭틸을 던졋으니. 중국신문들은 대서특필하며. 아깞다 한방에 보낼수 있어는데. 식의. 조롱기사를. 특보로 내보내는데.. 그게 빌미가되어..천황모독이 필미가 되어 일본군은 단숨에 상해까지 공격하게 되는것이고.. . 이봉창의거로 임정은 좀 운신의 폭(한중관계가 조금은 개선된것이니)이 생긴격이고 .. 상해를 딘숨에 점령한 일본군에 다시 윤의사가 폭탄선물을 하며. 일본군을. 만주로 돌려보낸것이다
이봉창의거는 일본에선 신문보도도 막앗기에 신문기사도 없엇다.. 그만치 충격이 컷던것이고 이 회외보는 의거다음날. 충격에 내각총사퇴한디른것괴
다음날 다시. 일부대신들(황실경호에 책임있는..)만 사직하기로 햇다는. 호외 보...며칠뒤 동경경시청장도 잘린다



동경경시청장 이취임 관련 사진. 이봉창의거후 일주일뒤 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