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갤러리(휴식처)

그림산책417조병덕(1916~2002)

각계♡ 2016. 11. 2. 09:17

 

조병덕

화가 조병덕의 그림에 시선이 가 닿는 순간, 영혼이 먼저 숨막힐 듯한 속도로 달려나가 가슴에 부딪히고 질식해버렸다. 극도의 어려움에 빠져 익사해가고 있는 식민지 청년의 손을 순식간에 낚아채고는 펄쩍 뛰어오른 뒤, 현실 바깥으로 퉁겨나가 차가운 나락에 함께 나뒹굴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후의 그림들은 차차 변화를 보여 그의 그림에 폭풍우는 없다. 격렬한 조형의 흔적도 없다. 삶에 서두르거나 떠들썩한 그런 일에 근원적인 의문이라도 던지는 것같이 화가 조병덕은 그의 회갈색의 그림에 태고의 정적을 낳고 있다. 그는 일단 자연의 대상 앞에 서게 되지만 이를 그대로 전하려는 생소한 정열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인위적인 구성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그런 냉혈적인 생리의 소유자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조형적인 주요한 관심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내면에서 분출하는 구성에의 욕구이지만, 이것을 그는 그가 선택하는 모티프와 유기적으로 융합시키는 데 작가로서의 온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즐겨 찾는 테마에는 「鄕」(향)이며 「삶」이다.

鄕一B

그것은 다름 아닌 성실한 인간의 삶과 그의 터전을 뜻하며 낯익고 정(情)이 흐르는 따뜻한 누대관계(屢代關係)를 말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과장은 있으나 허위는 없고, 리듬은 있으나 소음은 없는, 정직한 예술성이 담겨지게 된다. 대상을 단순화에 의한 재구성을 통해서 포용력 있게 받아들임으로써 세부보다는 전체를, 설명보다는 조형을 중히 여겨 모노톤의 색채 사용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뉘앙스를 풍기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고유한 작품세계가 화력 40여 년 동안에 처음부터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조전 출품 시절과 대한미협 출품 시절, 국전 출품 시절을 통해 그것은 조금이나마 변화를 겪어왔다. 1936년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친 시기를 전후하여 4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최초로 보여주었던 작품 경향은 일본 강점기 때문에 영혼이 숨막힐 듯 질식할 듯 익사할 듯 하다가 정확한 관찰에 의한 '자연 재현'을 하며 변한 것이다. 1946년의 《식사준비》 같은 작품이 이 시기에 속하는데, 안정된 구도 속에 탁월한 사실력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구상적인 표현정신에 기반을 둔 것이겠지만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쳐 그의 작품은 한결 화면의 구성이라는 새로운 '조형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곡선에 의한 화면 구분이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의 작품은 구상적인 초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색조의 조정은 사라지고 중간색의 미묘한 뉘앙스로 추상화된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어느 시기의 작품보다도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은 70년대로 들어서면서 추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구상의 경향이라 하겠다.

삶(生)

그는 목우회와 그에 이은 국전 심사위원,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신미술회 회원으로서 순전히 사실화가 그룹의 멤버로 활약했다. 허나 그의 그림은 처음부터 일관해서 자연의 재현, 그것보다도 오히려 그의 리얼리티에서 얻어진 이미지를 화면 위에서 재구성하는 특유한 구성화가로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늘날 미술시장에 비추어보면, 명성과 달리 어두운 시대를 보낸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16년 서울에서 출생. 1936년 일본에 유학, 태평양 미술학교 졸업. 1938∼43년 선전 제18, 19, 20, 22회 연이어 특선. 1940년 선전 최고상 수상. 1948∼77년 국전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 1955∼75년 국전 심사위원 역임. 1957∼7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60∼77년 초대전 및 회원전 여러 차례 출품. 1975년 한국신미술 회원. 1976년 개인전.